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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6. 6世 〉20. <부정공>양세성인실기발(兩世成仁實記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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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부정공>병사조공병자피화사변(兵使趙公丙子被禍事辨)
兵使趙公丙子被禍事辨 盖當 光廟丙子舊臣圖復 上王事泄多死之梅竹成公三問實爲謀首是故一門之禍㝡酷父子兄弟皆論以逆成氏固已無噍類矣而兵使趙公崇文亦以成公姑夫與其子哲山並及於難云或疑趙公不見於前輩文字然顧當時事有至難言者向非南秋江一筆雖如六臣者胥將泯欝不章况其餘人乎哉東閣雜記曰秋江所著畧而不詳豈聞見有未悉歟是不然其集中首記六臣之死而其下有曰同死者禮曹參判權自愼宋錫仝都摠管成勝等三十餘人以此觀之秋江豈眞有未悉而其特爲六臣立傳者以事專出六臣故耳且秋江既禍及泉壤家人惧文稿重爲厲階盡投烈火後人收拾見行於世則安知非六臣傳之外別有稱述者而歸於散逸之中耶獨怪夫東閣所記自朴仲林以下至許慥凡二十六人皆著其姓名而無趙公父子謂秋江不詳而已亦有未悉焉者何也趙公父子之死載成氏舊譜是譜成於弘治癸丑去丙子不過三十八年而成慵齋俔撰其序慵齋以 光廟八年壬午登第則丙子事盖甞目撃之者玆豈不彰明較著矣乎世之爲申高靈叔舟解者以爲成公之難延累者數百人而高靈多所平反不知當日賴高靈獲免者凡幾人而數百之中死者宜不止乎三十然則秋江東閣槩擧其㝡著者爲言而如趙公之株連罹禍固不得以盡記之也李公塏之妹婿承旨李徽亦同時被誅見於春坡日月錄而乃是東閣所記二十六人之外則趙公之見漏又何足疑哉同死於忠而不同其傳固可悲矣而當 朝廷追獎六臣之日又無擧而上聞者駸駸三百餘載事實寝晦嗚呼其將泯沒而止耶惜其殘禍之餘文籍蕩然生年表德與夫登科歲月内外宦蹟皆不可詳惟見於家乘者公之考瑜麗末人事親有至行官至副正麗亡 本朝屢以官徵之竟不起 莊憲王命旌其孝而特書前朝職以表其忠孝雙全公之所擩染乎家庭者亦自有素而及爲成襄惠公達生之婿也自少遊於梅竹公父子之間其相與期勉以盡忠所事者必有異於他人而畢竟同受其禍則公之平生本末槩可想矣子曰杞不足徵文獻不足故也若公則有成氏譜在焉其言雖畧其事則著何必多乎哉公之後孫顯範示以譜牒請余爲識遂書此以貴之盖亦微顯闡幽之意云爾 甲午季冬 全義 李基敬 識 병사조공피화사변(兵使趙公丙子被禍事辨) 대개 광묘(光廟) 병자년을 당하여 옛 신하가 상왕(端宗)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많이 죽으니 매죽 성삼문(梅竹 成三問)이 실상 모의자(謀議者)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러므로 일문의 화가 가장 혹독하여 부자 형제를 다 역적으로 몰아 성씨는 진실로 이미 살아남은 자가 없었고 병사 조공 숭문(崇文)이 또 성공의 고모부로 그 아들 철산(哲山)과 함께 화를 입었다. 어떤 사람은 조공이 전배의 문자에 나타나지 아니함을 의심하나 돌아보건대 당시의 일이 지극히 말하기 어려운 자가 있으니 먼저 남 ①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필단(筆端)이 아니었더라면 비록 육신 같은 자도 모두 장차 묻혀버리고 드러나지 않았을 것인데 하물며 그 밖의 사람이랴. 「②동각잡기(東閣雜記)」에 가로되 「추강의 기록한 바가 간략하고 자상하지 못하다」 하였으니 듣고 본 것이 미비한 점이 있어서였던가! 이는 그렇지 않다. 그 써서 모은 가운데 첫머리에 六신의 죽음을 기록하고 그 다음에 또 가로되 「함께 죽은 자 예조참판(禮曹參判) 권자신(權自慎) 송석동(宋錫仝), 도총관(都摠管) 성승(成勝) 등 三十여 인이라」 하였으니, 이로써 보건대 추강이 어찌 참으로 알지 못했다 하겠는가! 그 특히 六신을 위하여 전기를 쓴 것은 일이 전적으로 六신에 의하여 계획된 때문이었다. 또 추강이 이미 화가 지하에 미치매 집안사람이 문고(文稿)가 거듭 화단이 될까 두려워하여 다 불속에 던져 버렸던 것을 후인이 주워 모아 현재 세상에 유행한 것인즉 어찌 六신전 외에 별도로 기술한 것이 있었으나 소실한 가운데에 함께 넣어버렸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괴이한 것은 「동각잡기」에 박중림(朴仲林)으로부터 허조(許慥)에 이르기까지 무릇 二十六은 다 그 성명이 나타나 있는데 조공 부자만 없으니 추강이 자상하지 못했다 하겠고 또 다 알지 못했다 하겠다. 무엇을 가지고 하는 말인가 하면 조공 부자의 죽음이 成氏의 구보(舊譜)에 기록되었는데, 이 보첩은 홍치(弘治) 계축년(一四九三)에 이루어진 것으로 병자년후 불과 三十八년이요, 용재성현(慵齋成俔)이 그 서문을 지었 는데 용재는 세조(世祖) 八년 임오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은 즉 병자년 일을 대개 일찍이 목격한 자라 이를 어찌 밝힐 것을 밝혀서 비교하여 나타내지 아니하였을 것인가! 세상에서 고령(高靈) 신숙주(申叔舟)를 위하여 해명한 자는 말하되 성공(成公)의 난(難)에 연루자가 수백 인인데, 고령이 먼저 오판(誤判)을 반복 조사하여 공평히 처리한 바가 많았다 하니, 알지 못하겠도다. 당일에 고령의 힘을 빌어 화를 면한 자가 대강 몇 사람인가, 수백 명 가운데 죽은 자가 三十인에 불과하니 그런즉 추강과 동각이 그 가장 나타난 자만 대강 들어 말하고 조공같이 연루하여 화를 입은 것은 진실로 다 기록하지 아니한 것이로다. 이개(李塏)의 매서(妹婿) 승지 이휘(李徽)가 또한 동시에 주살(誅殺)을 당하였는데 「춘파일월록(春坡日月錄)」에만 나타나고 이에 동각이 기록한 바 二十六인 중에 들어가지 아니하였은즉 조공의 누락(漏落)을 어찌 의심하겠는가. 충성에 함께 죽고 그같이 전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슬프고 조정에서 따라서 六신을 장포한 날에도 또 들어 주상(奏上)한 자 없어 빨리 달리는 세월이 三백여 년이 되도록 사실이 어둡게 잠기었으니 아! 장차 그 햇빛을 못보고 말 것인가. 애석하게도 잔혹한 화란이 있은 나머지 문적이 아주 없어져 생년, 표덕(表德) 및 등 과(登科) 세월, 내외환적(内外宦蹟)이 다 자상하지 못하다. 오직 가승(家乘)에 나타난 자는 공의 선고 유(瑜)가 여말 사람으로 어버이 섬긴 지극한 행실이 있고 벼슬이 부정 에 이르렀는데, 고려가 망하니 본조(本朝)에서 자주 벼슬로써 불러도 마침내 이르지 아니하였다. 세종대왕이 그 효행을 정표하면서 특별히 고려 벼슬을 쓴 것은 충효 쌍전을 표한 것 이다. 공의 가정에서 이어받은 바가 스스로 근원이 있고 양혜공(襄惠公) 성달생(成達 生)의 사위가 되어 젊어서부터 매죽공(梅竹公) 부자의 사이에 노닐며 서로 더불어 힘 써 충성을 다하기로 기약하였으니, 섬긴 바가 반드시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어 마침내 함께 그 화를 입었으니, 공의 평생을 대강 상상하겠도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되 「기국(杞國)의 일을 증거할 수 없는 것은 문헌이 부족하 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공과 같은 이는 성씨 보첩이 있어 그 말이 비록 간략하나 그 일인즉 밝으니 어찌 반드시 많다고 좋을 것인가, 공의 후손 현범(顯範)이 보첩을 보이며 나에게 기록을 청하므로 마침내 이와 같이 써서 돌려보내니 대개 또 숨은 것을 나타내고 그윽한 것을 열어준 뜻이라 하겠다. 갑오(甲午) 계동(季冬) 전의(全義) 이기경(李基敬) 기록함 註:①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一四五四∼一四九二):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만년에 육신전을 저술하였으며 갑자사화때 김종직의 문인이 없다는 것과 소릉(昭陵) 복위를 상소하였다하여 부관참시되었다. ②동각잡기(東閣雜記):우리나라 고대로부터 이조 선조 때까지의 사실을 서적 또는 견문에 의하여 연대순으로 수록한 책. 선조 때 이정형(李廷馨)이 지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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